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최후 === ||<:>[[파일:La_Mort_de_Cicéron_-_François_Perrier_-_Bad_Homburg.jpg]]|| || 프랑수아 페리에 작의 '키케로의 죽음'. 1653년경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플루타르쿠스가 쓴 키케로의 열전]]에 따르면 키케로의 최후는 이렇다. 키케로를 체포하러 온 호민관 포필리우스, 백부장 헤렌니우스와 병사들이 그의 자택에 쳐들어오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때, 키케로의 아우 퀸투스[* 이 무렵엔 앙금을 털어내고 형과 화해한 상태였다.]의 해방 노예인 필롤로구스가 키케로의 [[가마]]가 오솔길을 따라 바다를 향해 갔다고 말했다. 포필리우스는 우회하여 달려갔고, 헤렌니우스는 숲길을 따라갔다. 추격당한다는 것을 안 키케로는 그 자리에 가마를 멈추도록 했다. 키케로는 왼손으로 턱을 만진 채 그를 죽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키케로가 가마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헤렌니우스는 그 목을 치고 손도 또한 잘랐다. 헤렌니우스가 그를 죽이는 동안 주위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플루타르쿠스 말고도 키케로에 대한 다른 기록이 있어서 키케로의 최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살생부에 올랐던 인물들은 목을 광장에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키케로의 경우 안토니우스에 대한 인신공격을 감행한 대가로 그 글을 작성하는 데 사용된 손까지 잘려서 전시됐다. ||<:>[[파일:Fulvia_y_Marco_Antonio,_o_La_venganza_de_Fulvia_(Museo_del_Prado).jpg|width=850]]|| || 프란치스코 마우라 작의 '키케로의 머리를 보는 풀비아와 안토니우스'. 1888년 || 일설에는 키케로의 잘린 머리를 받은 [[풀비아]]가 키케로의 혀에 펜을 꽂으면서 [[고인능욕]]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카이사르 사후 정세가 악화해 로마를 떠난 이후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했으나 군사 활동을 비롯한 여러 사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종국에 이르러선 서로를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소아시아에서 키케로의 최후를 전해 듣고 그의 죽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평했다.[* 카이사르 사후 혼란기, 키케로가 브루투스에 의해 부정적으로 다루어질 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언급되는 점이 자기 안위를 너무 챙긴다 혹은 겁이 많다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이 형성된 데에는 카이사르의 독재관정기 원로원 회의에 불참 내지는 참석을 거부하던 키케로가 카이사르 사후 잠시 회의에 참석했으나 정세는 혼란스러웠을지언정 로마의 앞날에 중대했을 이후 6개월간 다시금 불참한 일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고로 브루투스의 평가는 이 시기의 행보와 정계 복귀 후 자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로마를 다시금 내전으로 몰아넣는 데 기여한 사실에 대한 복합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먼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훗날 [[클라우디우스 1세]]가 되는 클라우디우스로 보인다.]가 키케로의 저작을 읽던 중 할아버지에게 발견되자 감추려고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받아들고는 잠시간 읽다가 이윽고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고 한다. >λόγιος ἁνὴρ, ὦ παῖ, λόγιος καὶ φιλόπατρις. >'''교양있는 사람이었지, 얘야. 교양있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애국자였고.'''[* "A learned man, my child, a learned man and a lover of his country." 플루타르크. 키케로의 삶 49.3[[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plutarch/lives/cicero*.html]]][* 플루타르크가 그리스어 저자라 넘어가지만, 정작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 인정할 정도로 그리스어를 못 했다. 그리고 키케로의 아들이 필리페 전투 이후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한 이후로 측근이 되었고, 그 이후 키케로의 저작들이 출간됐을 정도로 대접이 나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